작성일 : 14-08-19 15:24
중앙아시아권 선교 25년 평가와 전망 1 (김다니엘선교사)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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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복음전파의 사각지대

소연방의 해체는 70여 년 동안 갇혀 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무대에 올라오게 만들었다. 중앙아시아는 1989년까지 복음전파의 사각지대로 세계선교계에서는 사마리아와 같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8세기부터 아랍에서 유입된 이슬람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민간신앙 위에 덧입혀져서 ‘튀르크인은 무슬림’이라는 외적 자기 정체성을 표방해왔다.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남하정책을 진행해온 러시아 제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광활한 스텝을 누비며 살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에 대한 식민지배를 공식화하였고, 양과 염소, 말 등 가축과 자유롭게 살던 이들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안에 가두어 놓았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체제는 인종적으로 슬라브계를 비롯한 9개의 백인 공화국들과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6개의 아시아계 공화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작, 우즈벡, 크르그즈, 투르크멘, 아제리, 타지크 등 아시아인들로 구성된 공화국이 공산 쿠데타 이후 차례로 독립했다.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 속해 있는 아시아 공화국들 중에 타지크는 이란(페르시아)계이고, 나머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크르그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은 튀르크(돌궐)계 민족들이다.

소비에트의 지난 70년 통치기간 동안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인들은 가슴에 이슬람을 묻고, 얼굴에 소비에트라는 가면을 쓰고 철저하게 무신론 교육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철의 장막(Iron Curtain)’속에서 바벨론 포로와도 같은 유수기를 보냈던 튀르크인들은 외부 세계를 볼 수도 없었고,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의 서방 기독교 국가들에게는 15개 연방 국가인 소련을 들여다 볼 수도 없었고, 들어갈 수도 없는 금단의 구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지역은 세계 교회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철저하게 차단되었고, 중앙아시아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오랫동안 세계 선교의 밭 한가운데 깊이 박혀 숨겨 있어야만 했다.

I. 열강의 각축장
그 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튀르크 계열의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개방되자 세계의 강대국들은 지정학적(Geo-political), 지경학적(Geo-economical) 이해관계를 따라 중앙아시아에 접근하면서 관심을 표명하였다. 무엇보다도 강대국들은 중앙아시아 국가에 배치되어 있었던 핵무기에 관심이 많았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카자흐스탄은 가장 먼저 세계열강의 주목을 받았고, 동시에 카스피해를 중심으로 매장된 엄청난 양의 원유와 천연자원은 국제사회를 자극하고 유혹하기에 충분하였다. 카스피해를 공유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이나 투르크메니스탄 또한 원유 생산국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많이 얻었다. 중앙아시아 최대 인구를 가진 우즈베키스탄은 시장성과 그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열강의 국제 정치적 관심을 모았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는 오랫동안 동서양 문명 교류의 산파 역할을 해왔다. 광활한 스텝지역과 사막의 한 가운데 존재하던 크고 작은 오아시스들은 점차로 도시로 발달되어 지난 2,500년간 대상들을 살리고 교류하는 생명샘 역할을 하였다. 21세기 신실크로드(New Silkroad)는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이루는 대동맥으로 선교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학술 연구, 역사, 문화와 문명교류, 정치 경제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중앙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교적 각축장으로 신거대게임(New Great Game)의 중심부가 되어가고 있다.

또한 1937년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극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한인들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인근 국가들에 집단농장을 이루어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약 40만 명의 고려인들은 소련 최대의 고려인 집단으로 한국정부와 한국교회는 이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도 이전까지 중앙아시아는 세계선교계에서 잊혀진 곳이었고 여러 미전도 민족들 중에 인구 비례면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소비에트의 사회주의는 붕괴되었으며, 이제 중앙아시아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추수할 땅이요, 영적 기업이다.

II. 종교 및 교회상황
1. 이슬람의 부상
중앙아시아가 이슬람권이며, 이곳 주민인 튀르크인들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이슬람화되기 이전에 이들의 정신적, 현실적 문제를 지배했던 과거의 신앙과 종교들이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큰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특별히 중앙아시아의 고대 종교였던 샤머니즘은 이들의 문화와 관습에 여전히 남아있으며, 사실상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무속적 이슬람’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이슬람 신앙은 신비주의와 미신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아왔다. 러시아에 의한 1세기 이상의 정복과 70여 년의 소련 공산주의 지배하에서 현대화와 교육화, 이데올로기화로 이슬람은 수난을 겪었으나, 소연방이 와해되고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슬람 사원이 재건축되고, 이슬람 학교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슬람 모자를 쓰는 사람이 늘어가고 쿠란과 하디스 등 이슬람 서적의 보급과 판매량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동 이슬람국가들에서 파견된 이슬람 포교사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활동을 보면 기독교 선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포교사들이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훨씬 더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최신식의 거대한 이슬람 사원, 문화원, 특수 전문학교 설립, 병원 설립, 대학 및 이슬람 대학 설립 등을 통하여 친중동적인 이슬람 전문가들을 양성하면서 이슬람으로 회귀를 강조하고 있다.

2. 기독교 상황
1989년 구소련의 개방과 개혁정책 이후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들의 북방사역은 시작되었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과 함께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앙아시아의 문이 열리자마자, 한국과 미국의 한인 선교사들은 중앙아시아의 우리 동포들인 ‘고려인Koreyskiy' 을 대상으로 활발하게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초기 선교사들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는 고려인과 러시아인들을 주 사역대상으로 삼았고, 기본적인 러시아어를 습득하여 고려인 중에서 한국어를 아는 통역자를 세워 사역을 시작하였다. 선교사역 초기 5년 동안 수많은 한인 선교사들이 고려인 마을 마을마다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96년 미국남침례교 선교부는 중앙아시아는 더 이상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역은 필요지 않다고 판단하여 소속 선교사들을 재배치하였다. 이는 당시 천명 이상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에는 1~2개 이상의 등록된 고려인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에만 60여 개가 넘는 등록된 고려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복음의 수용성이 놓은 민족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로 공개 사역을 하면서 다민족 교회들을 개척하였다. 초기 10년 동안 러시아인과 고려인들에 대한 사역은 충분한 열매를 거두었고, 역동적인 사역이 이루어져 크고 작은 많은 교회들이 등록되었다. 사랑의교회, 은혜교회, 소망교회, 믿음교회, 살렘교회, 중앙교회, 주님의교회, 복음교회, 샘물교회, 영광교회 등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다수를 차지하는 현지 튀르크인들을 위한 사역기반은 매우 미약하였다. 선교사역이 시작될 당시 대부분의 민족들에게는 완역된 성경이 없었다. 누가복음, 마가복음 등 부분적으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후에 창세기, 시편이 번역되었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크르그즈스탄에서만 완역된 성경이 배포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어로는 완역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신약만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완역된 성경은 부재하였지만, 국제 CCC의 ‘마케도니아프로젝트’를 통하여 '예수' 영화가 영화필름과 비디오로 제작되어 각 민족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되었으며, 전도용으로 사용되어 예수 영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다.

2,000년도까지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도시와 수도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고, 그나마 소수의 기독교인은 거의 러시아인이나 고려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정작 현지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수적으로도 극히 소수이었으며, 정부는 현지인에 대한 복음전파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고, 그로 인해 현지인들의 교회등록은 쉽지 않았다.

현지인 사역에서는 공개사역이 제한되어 이 민족에 맞는 총체적 선교를 할 전문인 사역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지인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종교비자가 아닌 전문인의 신분으로 비자를 얻어 국가가 인정하는 일을 해야 했다. NGO 및 기관, 비즈니스 회사를 설립하여 국가 및 지방정부에 법적으로 등록하여 비자 및 신분의 안정을 얻어, 교회개척에 필요한 사역과 사회활동을 하였다. 특별히 현지인들은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에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직접적 전도가 어렵고 공개적인 기독교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보안지역에서의 NGO 및 기관 활동은 국가의 신임을 받았고 국민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NGO 사역을 단순히 사회봉사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아 교회개척이라는 사역적인 열매를 맺으려고 시도하였다.

무료급식, 빈민구제, 장학금지급,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장애인, 의료진료 및 이동진료, 지역 주민봉사, 지역 어린이를 위한 탁아소 운영, 방과 후 공부방 운영, 미용실, 직업기술 및 훈련, 어학원, 컴퓨터 학원, 음악교실, 미술교실, 유치원, 스포츠, 학교, 병원, 문화센터, 연구소 설립 등을 통하여 사회와 문화 전반에 총체적인 사역이 진행되었다.

전문인 사역자들 중에는 학교와 대학교에서 학생신분이나 교수사역을 통하여 현지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전도를 통한 제자를 세워갔다. 회계학이나 경영학, 법학을 강의하는 경우도 있고, 컴퓨터나 한국어, 영어 등을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지식은 물론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바른 사고와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시도하였다.